장완영 화백의 그림에 부치는 엽신

봄.

기억의 서랍을 연다. 내 유년은 가난했으되 내 추억은 언제나 눈부시다.

연두빛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강으로 가는 수양버들.

산비탈마다 눈부신 산벚꽃 폭죽처럼 터지고 읍내로 가는 길목,

바람난 꽃집 여자가 새빨간 치마를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짙푸른 미루나무 숲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

박살난 햇빛 속에서 시간이 희석되고 있었다.

멀리 양옥집 한 채, 나른한 졸음에 어깨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산 너머로 떨어지면 마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어둠.

마당 가에 놓여 있는 상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 아버지가 흥부처럼 커다란 박을 타시는 꿈도 꾸었다.

그러나 박 속에서 금은보화는 쏟아지는 않았다.

가을.

아이들마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린 공터.

떠돌이 행상 하나가 리어카에 목판을 깔고 구운 오징어를 팔고 있었다.

등 뒤에는 이파리가 모두 져버린 나무들. 허망하다.

인생은 어느새 갈색으로 퇴락해 버렸건만 나는 왜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겨울.

정지한 시간 속으로 함박눈이 내린다. 너무 오래 객지를 떠돌았다.

어머니는 오늘도 사립문을 열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실까.

비록 천하에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소설가 이 외 수

 

 

 

 

기억의 침전물, 이미지의 근원을 향한 몸짓-

그가 그리는 작품들은 흔히 대지와 하늘의 경계가 지워지고 경계 또한 불투명하거나 모델링과 입체가 배제된다. 인물과 사물들의 윤곽이 뚜렷한 선들로 구획되기 보다는, 한 겹을 벗겨낸 바탕에 흔적으로 남겨진 선획들의 점철에 의해서 드러난다. 면과 면만으로 이어지는 무한공간들은 흡사 민속화의 화풍을 생각나게 한다.

장 교수의 작품들은 이렇듯 전적으로 우리의 토착문화와 정서로부터 이루어졌다. 그가 이것들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은 철저하게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오랜 시간속의 기억들을 필터로 삼는데 있다. 3-D에 의한 작품의 규범들을 물리치고 2차원 회화양식을 과감히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의 기억속의 침전물들을 이미지로 엮어 올린 것 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지의 근원과 가장 가까운 곳에다 근접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이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인식시키는 원초적 지점을 일깨운다. 흙과 바람으로 이야기되고 요약되는 우리의 정서가,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담아내고 있는 이미지의 원형이자 내용이다.

그가 그리는 이미지들은, 이 때문에 현실의 사물들과 그것들의 세세한 외관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2차원 평면에서만 생존하는 독립된 기호들이다. 그것들은 지시물을 현실의 공간에다 두기 보다는, 상징공간을 만들고 상징공간에다 지시물을 잠재시킴으로써 우리의 근원적 토착정서가 촉발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것들의 기의(記意)는 우리의 일상인들이 갖는 생활세계의 그것과 진배없다.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가 하면 풍요와 희망은 물론, 고독과 슬픔이 근저에 깔려있다.

그의 이미지가 엮어내는 상징공간은 잠시 우리를 의식 속에 간직한 설화의 세계로 안내할 뿐만 아니라 홀연히 우리가 장기 기억 속에 침전시켰던 태고의 의식을 일깨워 준다. 이 의식은 잠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 품목이기도 하다. 이 의식이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그의 이미지들에 의해 촉발된다. 그의 작품이 갖는 매력이 바로 이것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그가 그의 기억 속에 침전시킨 앙금들을 분출시킨 것에다 우리 또한 거기서 우리가 우리의 기억 속에 은닉시킨 앙금들을 추가하고 연쇄적으로 촉발시킴으로서 읽고 이해되게 하는 하나의 비주얼 텍스트이다.

그의 작품들은, 이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은 왜 이미지를 그리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과 의식의 심연을 응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바깥에서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이미지를 촉발시키려는 책략의 일환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이미지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 복 영 / 미술평론가, 홍익대교수